“…저어, 쥰…씨. 이후에 일정이라던가 따로 있으신가요?”
조심스럽게 들려온 작은 목소리가 그에게 물음을 건네었다. 소년은 소심하였음에도 어떻게든 제 할 말을 다했고, 그런 다음에도 미안하다느니 죄송하다느니, 자신을 낮추는 데에 급급한 아이였다. 쥰은 그를 바라보다가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던—하지만 그와 상당히 유사한 지점을 가진 여우가면의 소년을 떠올렸다가 지워낸다.
“없습니다. …같이 산책이라도 할까요? 아이쇼핑이라던지.”
그러니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제안했다. 방금 막 연락처를 저장한 화면에는 ‘미카즈키 유이토’라는 이름이 「친우」 카테고리에 얌전히 들어가 있었다. ‘초승달의 연을 맺다’라. 좋지 않은가. 비록 지금은 저녁도 아니지만… 괜히 시간을 가늠해보다가, 그의 대답이 들려오는 것을 귀에 담는다. 표정이 밝아 보였다.
“저, 개인적으로 가… 보고 싶었던 디저트 카페가 있는데.”
같이 가보실래요? 혼자서는 도저히…. 제법 용기를 낸 듯한 이야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혼자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곳이긴 하죠. 그는 간만의 ‘디저트 카페’라는 용어에 대해서 떠올려보았다. 선물용으로 뭔가를 살 때가 아니라면 좌석에 앉아서 뭔가를 먹은 일은 잘 없으니까. 보통은 연인끼리 데이트로 그런 곳을 자주 가겠다만, 그것도 자신에게는 무척 예전 일이었다.
“알려주신다면 흔쾌히.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나나시 군의 소식도 알려주신 겸.”
“뭔가… 쥰씨한테는 늘 얻어먹는 것 같네요.”
‘…….’
쥰은 잠시 동안의 위화감을 무시해주었다. 숨기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완전히 분리해주는 게 맞는 거겠지. 소년은 휴대폰을 들어올려 인터넷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던 카페 하나를 가리켰다. 익숙한 모양새에 쥰은 사진을 한 번 눈으로 훑어보았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라면 세이부 백화점의… 다이닝 파크 쪽일 겁니다. 아마 8층이었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멀지 않으니 가 볼까요. 평일이니 사람도 적을 것 같고. 라는 말에 유이토 군은 눈에 띄게 안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디, 디저트 같은 건 좋아하시나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당분을 먹을 여유 정도는 있으니까요.”
쥰은 짧게 웃었다. 라멘집이 아닌 카페를 혼자 다니는 일은 잘 없었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업무 용도일까. 간혹 카페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싶다거나 하는 세대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뭐, 나쁘지 않았다. 대신 그럴 때는 편안하게 디저트를 시킬 만한 여유가 없으니까.
“그럼 오늘은 디저트 파티를 해야겠네요.”
돈은 전부 내가 낼 테지만 말이다.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알고 있는 길, 언제나 지나다니는 거리.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사람들. 이케부쿠로는 그런 장소였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익숙한 사람을 몇 번이고 만날 수 있는,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언제고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마경의 도시. 그런 곳에서 익숙하지 않았으나 익숙한 두 사람은 발걸음을 옮겼다.
“일에 지친 현대인들에겐 쉴 구멍이 많을 수록 좋다고 하니까요.” 저와는 먼 이야기지만. 쥰은 이야기를 덧붙이는 유이토를 바라보았다. 그의 자존감은 어느모로 보나 낮은 편에 속했다. 약한 대인기피의 형태도 보이는 것 같고. 이런 이들을 사무상대로 만나면 어렵기야 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유이토 군이 저와 비슷한 일을 할 리는 없겠지만, 누군가를 업무적으로 만나게 될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신호등이 점멸하다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초세기가 시작되고, 횡단보도의 시작점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사거리의 모서리에 모인 높은 건물이 즐비어 시야에 잡힌다. 가게, 사무실, 그리고 오피스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벌집과도 같은 사각형.
“그게 꼭 회사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일이어도 그건 ‘일’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그리 멀진 않을 겁니다.”
초세기는 계속된다. 횡단보도의 시작점과 끝점에 사람들이 점점 몰리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끊기지 않고, 거의 설교에 가까운 이야기였으나 유이토는 경청해주었다.
“그게 연속된다면, 일에 지쳤다는 감각도 가끔은 좋은 피로감으로 쌓이게 되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서 어쨌다고? 같은 대답이 들려와도 이상할 게 없는 문장이었으나 하나부사 쥰은 진지했다. 풀어말하자면, ‘너도 다를 것 없으니 소심해지지 마라…’ 같은 이야기겠지. 그럼에도 유이토는 적당히 걸러들은 뒤 알아준 것 같았다.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었고, 대기하던 모두가 일제히 발걸음을 옮긴다.
“쥰씨는… 뭐랄까…, 어른이네요….”
그 단어에 쥰은 유이토를 바라보았다. 형용키 어려운 심정이었다. 평소에 듣던 아저씨와는 꽤 다른 울림이어서였던지, 이상한 부분에서 인정받은 것 같기도 하고. 일단,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알아 준 건가? 하는 복잡한 마음에 가만히 이어질 그의 말을 들었다. 유이토는 꼭 변명처럼 말을 덧붙인다.
“…최, 최근에 아는 분께 성인과 어른은 다른거다, 라고 들었는데. 쥰씨는 딱 이상적인 어른이란 느낌인것 같아요.”
백화점에 들어서는 것도 금방이었고, 눈 앞에 목표했던 가게가 보이는 건 시간문제였다. 벌써부터 간판이 보이자, 쥰은 그곳을 향해 눈짓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상적인 어른이라. 이런 어른이 되면 안 될 텐데. 어쩐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렇습니까.”
음. 큰일났다. 잘 대해 줘야겠는데. 어떡하지? 사실, 그는 어린 학생들—주로 십대에서 이십대까지—을 잘 다루지 못했다. 어떤 식으로 대화하는 지도 몰랐고, 이런 식으로 대화에 성공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
“…아, 저기. 저기 맞죠?”
“아, 맞네요. 저 쪽.”
칙칙한 옷차림의 성인 남성 두 명은 직원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깔끔한 인테리어에 적당한 아기자기함. 그래도 고풍스러움이 남아있어서인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사람은 적었고, 대화 소리는 고요했다. 유이토는 먼저 메뉴판을 들고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먹고 싶은 게 있다더니, 그 중에서 고르고 있는 걸까. 메뉴판의 표지를 바라보며 책 표지의 디자인에 대해 심도 깊이 고민에 빠져 있던 쥰의 생각을 가르고 그의 메뉴 선정이 지나간다.
“저는… 이 말차 케이크가 먹어 보고 싶어요.”
“흠… 마실 건요? 저는 캐모마일로 하겠습니다.”
쥰은 그가 기울여 보여주는 메뉴판을 빠르게 훑으며 ‘차’ 부분으로 시선을 두었다. 이런 곳에서 주로 마실 건 얼음이 들어가지 않고 집에서는 만들기 귀찮지만 가끔 느긋하게 마시고 싶은 것들 종류니까. 게다가 피곤할 때는 캐모마일이라고 누가 추천해줬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 피곤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서도.
“…마실 건… 녹…차 라떼로…”
쥐구멍에 들어갈 만한 목소리가 되었음에도 잘 들었으니 요행일까. 그는 자신만큼이나 카페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요즈음은 벨을 눌러 사람을 부르는 시스템이 특화되어 있으니까, …라곤 해도 이곳은 없군. 테이블에 있을 법한 호출 벨을 빠르게 찾아보았지만 없던 터라, 쥰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서 직원을 불렀다.
“말차 케이크 하나와 녹차 라떼, 캐모마일도 하나 부탁드립니다.”
휘핑 크림은 올려드릴까요? 하는 이야기에 하나씩 말을 전달하다 보면 말은 쉽게 트였다. 무언가를 주문하는 것에는 도가 트이기도 했고, 오히려 제 눈 앞에 있는 소년이 다른 이들과 이야기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았으니 도와주는 게 당연했으니까.
가면을 쓰면 나아지는 걸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타인처럼 굴 수 있다는 점에서는 정답인 것 같았다. 물어보기엔 민감한 문제이니 속에 담아 두는 걸로 하자. 이후의 이야기는 지극한 일상이었다. OO가 없어진다는 이야기라던가, 누군가의 ‘분탕질’ 이야기라던가. 직원이 다가와 테이블 위로 메뉴를 진열할 때엔 다시 수그러들었지만, 돌아가고 나면 다시 입이 트였다.
“아하하… 만화에선 가끔 이런게 마지막 만찬이 되기도 하던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옵시다.”
쥰은 그 농담이 마음에 들었던 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면 마지막이 아니게 되지 않습니까. 포크를 들어올려 사각, 케이크를 한입 크기로 잘라 입으로 가져간다. 소문이 날 정도라더니, 확실히 맛있긴 하군. 말차 향도 강한 데다가 생크림도 과하지 않고… 빵도 맛있어. 소년도 비슷한 생각이겠거니 싶어 앞을 바라보면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그가 보인다.
“…또 같이 와 주시나요?”
의외의 물음이 돌아온다. 그 또한 쥰의 반응이 의외라 생각한 듯 눈을 깜빡이고 있더니 긴장이 풀린 것처럼 웃었다. 그 동안 캐모마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김이 오르는 차가 넘어가면 속이 풀리는 느낌이라 그는 이것을 제법 좋아했다. 케이크 같은 디저트와도 상성이 잘 맞는 것 같고. 맛있다.
“예. 확실히 어딘가에서 소문이 날 만은 하군요.”
“…다, 다음번엔 쥰씨가 맛있는 카페 찾아와주세요.”
“그럴까요.”
달그락, 수저를 드는 소리가 추임새처럼 지나간다. 일상적인 이야기. 평소에 하지 않았던 일이 일상으로 편입된다. 이것을 유지하는 건 온전한 자기의지.
“그럼 저도 한 번 추천받아 오겠습니다.”
올해 들어올 예정인 젊은 신입들이 많아서요, 아마 물어보면 알려주지 않을런지. 그런 답에 그의 연령이 다시금 짐작되었지만…. 글쎄. 불편한 건 신입들의 사정이다. 어쩔 수 없지. 클래식이 흐르고, 그렇게 일상은 다시금 굴러간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2011년 11월 25일, 이케부쿠로 동쪽 출구 세이부 백화점 말차 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