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2011년 11월 O일
…이하, 언제나처럼 감상을 서술한다.
‘요키치는 사랑스러운 쓰레기’에서의 그의 행보는 어느 모로 보나 무책임하고, 눈을 씻고 보아도 악행이라 말할 것들 뿐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왜 이를 더러 사랑스럽다 칭하는가? 연출을 가하자면, 그의 백그라운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후에 표현된 배경 설정 말이다.
사람은 태어났고 그로 인해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에 당연스럽게도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다. 그런 당신의 과거에 누군가는 말한다. 돌을 던질 수 있는 자는 죄 없는 자 뿐이라고. 우리는 청렴한 인생을 살고 있는가? 살아가기에 앞서 잘못을 인식했다면 그 순간은 잘못을 행했을 때 뿐이다.
날 때부터 선한 자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죄라 인식하지 못한 순간이 존재하고, 그 순간에 죄를 저질렀기에 그것이 죄라는 것을 인식한다. 연역론적인 방법이나 이에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도 모르게 죄를 저지른 적이 없을 것이라고 그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아주 단순한 것을 예로 들어 보겠다. 당신은 이동하기 위해 걷는다. 설령 걷지 못하더라도 무언가의 수단을 통해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묻겠다. 그 때 아주 작은 개미를 찍어 눌러 죽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생명을 죽이는 것은 분명한 죄다. 당신은 확언할 수 있는가.
이런 딜레마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요키치에게 공감한다. 그리고 역겨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미가 아닌 개미를 밟아버린 자기 자신에 취해 애정을 느끼게 된다.
이 과정은 직접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니, 리뷰만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부디 한 번 감상을 시도해보길 권유드린다.
별점 ★★★★☆
└ 꽤 좋은 평인데 왜 5개가 아님? |2012년 1월
└ _| (답글을 입력해주세요…)
마우스를 잡은 손이 멈춘다. 아주 간단한 댓글 한 줄을 바라보며 하나부사 쥰은 고뇌한다. 별 하나를 왜 뺐더라. 그리고 작가의 인삿말을 떠올려낸다. 글을 쓸 때는 아니었으나, 이제는 작가의 실제 면모를 알고 있었다. 오오우나바라 이치지쿠. 그는 상냥한 어조로 종이의 날을 세워 첨예하게 지문을 긁었으며, 모두에게 하나의 동질감을 부여했다. 키보드 위로 가던 손이 잠시 동안 정지했다.
그 기조는 언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어떻게 대답할지를 선택했고, 조심스럽게 자판을 눌러 달각댔다.
└ 자기혐오 때문입니다. |2012년 1월
이걸로 좋은 답이 되었겠죠. 그나저나 2월은 신간을 낸다고 하셨던가.
취재를 하러 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뭐, 그래도 무사하시겠지. ‘천사’ 씨도 계실 테니까요.
그는 책에 끼워두었던 부적 모양의 책갈피를 빼내었다. 그리고 책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
그나저나, 몇 달 전에 쓴 리뷰에 뒤늦게 댓글 달지 마세요.
누굽니까,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