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그렇군요.」
「세탁 예약도 받으십니까?」
「옷 세탁은 안 받고,
다른 걸 세탁하고 싶다면…
그건 24시간 운영한단다.」
「감사합니다.」
「죽지 않는다면 찾아뵙겠습니다.」
「…?」
「그래, 죽지 말고.」
거센 비가 쏟아졌던 날의 새벽. 난장판이 되어 있는 세탁소를 누군가 똑똑 두드렸다. 그곳의 주인은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문을 벌컥 열었다. “아이씨… 이 밤중에 누가……” 그리고 노크의 당사자와 눈이 마주치자 흐르는 침묵. 검은 눈동자 두 쌍이 서로를 응시했다.
“……어서와?”
“안녕하십니까.”
그제서야 인사가 이루어진다. 객客, 하나부사 쥰은 가벼운 눈짓으로 열린 문 틈을 살폈다. “대화 전에 손이라도 보태겠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주主, 시로코는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그래, 들어와.” 쓰러진 건조대를 일으켜 세우고, 떨어진 것들을 주워 선반에 차곡차곡 올리거나. 그러던 이후로는 가벼운 이야기들이었다. 왜, 당신도 암암리에 소문을 들었나 봐. 딱히 ‘그 짓’이 필요해보이진 않는데.
“반시라는 닉네임 말이죠,”
그러나 쥰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바로 본론을 꺼내기에는 어폐가 있다 여긴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아이스 브레이킹을 시도했다. “어제 괴담 이야기를 다들 하던 통에 검색을 한 번 해봤었습니다.”
시로코의 움직임이 멈춘다. 이윽고 터뜨린 것은 실소.
“아핫… 아, 그거 말이지. 당신 저번에도 채팅에서 말했었지, 나 정말 깜짝 놀랐다고.”
설마 그 멍청이들 중에 제대로 읽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시로코는 마저 책상을 정리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 독음이 반시인 단어는 꽤 많을 텐데. 검색하니까 뭐라고 나오던?” 그녀는 즐거워 보였다. 아니, 이 상황을 즐기는 걸까, 혹은 신기해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일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아니었다. 그들이 지낸 세월은 너무나도 길어서, 가끔 이상하게 튀기도 하니까.
“아일랜드의 요정 이야기더군요. 울어서 죽음을 예고한다는.”
그리고 OO에서는 울음소리에 대한 이야기가 성화였고요. 작은 잔해들을 쓰레기통에 우수수, 넣으며 그는 손을 털었다. 그 뒤에야 그는 시로코를 바라보았다.
“……어제, 울었습니까?”
“채팅방에 반시를 한자2로 읽는 멍청이들만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지.”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두껍게 모인 서류철이 책상을 향해 쾅, 내리찍혀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듣고 움찔한 것은 쥰이었다. 겁을 먹기라도 했을까. 시선이 다시 얽혔다. 입꼬리를 올린 그녀의 표정에서 언어가 튀어나온다.
“질문은 이쪽이 해야 할 것 같은데.”
아주 짧은 간극. 그리고, 짧은 질문.
“들었니?”
인정한다. 그는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값싸게 말하자면, 그래. 쫄았다.
그는 속으로 ‘듣다’, ‘경청하다’, ‘Listen’, ‘聞く’, 수많은 단어를 곱씹었다. 그리고 하나로 귀결시킨다.
“…늦었지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평범한 닉네임이라고 생각해서….”
그래, 빠르게 결례를 범한 점을 사과하자. 남들의 앞에서 본명을 부른 셈이 되고 말았으니까.
물론 겁먹은 것도 맞다. 알아차렸어도 기왕이니 구박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이건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예견된 일이었으니까.
“아니, 사과할 필요까지야.”
예리한 건 죄가 아니란다. 대부분 별 생각 없이 넘긴 것 같고… 물론, 아닌 사람도 있긴 했지만. 이어지는 말에 푹푹 찔린다. 탓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사장님에게는 상당한 결례였을 것이었다. 곤혹감을 선사했다고 해야 할까. 어느 쪽이든 간에 그녀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을 테다. 하나부사 쥰은 반성을 거둘 기미가 없어 한참 동안 침묵했다.
“어쨌든, 당신… 누구처럼 오컬트 마니아도 아니고, 그걸 목적으로 온 건 아닐 거 아냐?”
그리고 꿰뚫었다.
“슬슬— 이 밤중에 여기까지 찾아온 목적이란 걸 들어보실까.”
쥰은 허리를 펴며 얼추 정리된 가게 안을 바라보았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괴담들이 하나씩 퍼즐을 이루며 맞추어져가는 것 같았다. 이는 현실이자 직면한 현재였다. 상당히 꺼림칙하면서도 묘한 기분에 그는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입을 여는 데에도 체감 상 몇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그러나 진실된 몇 분 동안 그녀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었다.
“신분세탁을 예약한다고 했었죠. 하지만, 언제인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양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시선을 피한다. 그는 고심했으나, 자신의 인생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비현실적이면서도 간편한 방식을 찾아왔다. 단지 그 뿐이었다. 도피, 그리고 최종적인 안식.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이곳에서 떠나야 할 때가 되면, 완전히 없어지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할 때가 되면….”
그러나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보잘것없이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변변치 못한 인상이 더욱 하찮아진다. 저는 이케부쿠로에서 떠나기 싫습니다. 여기가 좋아요. 제2의 고향이기도 하고. 이곳에서 이룬 것도, 얻은 것도… 경험한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최근은, 점점 감당할 수 없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느릿하게 이어지는 이야기의 끝은 목메임이다.
“…그저 보험처럼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정말로, 가능한 것인지.”
거절하셔도 되고, 못 들은 척을 하셔도 괜찮고요…, 그러다가 또 한참을 침묵한다. 잠긴 목소리를 헛기침으로 어떻게든 끌어올렸다. “흐음. 그래?” 하고 간결한 답변이 돌아온다. 장황한 질문과 설명을 앞두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감히 예상도, 분석조차도 할 수 없었다.
“늦은 시간에 실례를 끼쳐 죄송했습니다. …제가 더 치울 건 없습니까.”
[그러나 시로코는 이곳에 얼마 있지 않은,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힌 사람들을 생각한다.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자와, 그 파티시에 사장… 정도밖에 생각이 안 나는군. 그 중에서도 후자는 이곳에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고… 의외로 늘 호통을 쳐대면서도 멀쩡한 사람이니까. 따지자면 강인하다 해도 옳을 것이다.]
[허나 제 앞에 있는 자는 어떠한가? 이토록 비루하게 떨고 있는 꼴을 보니…]
“당신, 정말 비일상을 끔찍하게도 싫어하나 봐?”
당연한 이야기를 건넨다. 시큰한 콧잔등을 문지르고 있던 남자는 그 물음에 다시 우울해졌다. 그런데 하나만 묻자. 하고 그녀의 물음이 이어진다.
“그냥 이사를 가면 되지 않나? 굳이 신분까지 바꾸려 드는 건 이해가 안 되는데.”
이것은 그녀의 알 수 없는 호의에 가까웠다. 아마도 나중이 된다면— 분명 후회할 것이라 자부했지만 당장은 깨닫지 못했다. 하나부사 쥰은 비즈니스맨 답게 그녀의 물음에 조목조목 답했다. 유통사에 남는 이름. 오로지 혼자서만 조작하는 기계. 그리고 선명히 한 명을 가리키게 될 수사망. 그는 납작하게 보자면 ‘들키지 않은 범죄자’가 되어 있었다. 자칫하면 아주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을 만큼—물론 최악의 경우에 한해서지만—말이다.
“저를 아는 사람들이 연관되면 실례잖습니까. 부모님까지도요.”
킁, 하고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 사이 괴담은 생각에 빠진다. 그녀의 목적은 사실 ‘세탁’보다는 ‘밀고’에 가까웠다.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란다.” 낭랑한 목소리가 그를 향한다. “내게 생명줄을 내어주고도 얻을 만한 메리트가 있다면, 뭐… 잘 생각해보라고.” 맡긴다면 이쪽이야 환영이지만.
그리고 그는 힘없는 낯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씁쓸하다, 라고 해야 할까. 절망에 빠졌다고 해야 할까. 끝이라고 생각했던 희망이 끝이 아니라 또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의 말로였다. 처음부터 그런 장난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후회감이 밀려들어오지만, 십년하고도 몇 년 정도가 더 늦은 결단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그녀의 말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마음 속에 묻어두었던 두 번째 계획의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사장님께서는 경찰과 야쿠자… 둘 중 어느 쪽에게 쫓겨야 더 생존률이 높다고 보십니까?”
사실상 둘 다일지도 몰랐지만, 쥰은 굳이 두 가지를 다른 선상에 놓았다. 시로코는 그 질문을 듣고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꼭 일부러 지은 듯한 표정이었다.
“전자가 높은 편이지. 당신, 빚도 졌다면서?”
그쪽을 쫓아올 야쿠자가 한 둘이 아닐 것 같은데…. 뒤이은 말에 쥰은 다시 한숨을 쉬며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불안감이 그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두번도 아닌 처사지만.
“해외까지도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여권은 아직, 없지만….”
하지만 상공이라고 무사할까? 오히려 그곳이 좀 더 도망치기 어려운 건 아닐까. 가끔 영화에서도 나오지 않던가. 하이잭이라던지. 이런 걱정이 물밀듯이 불어나 점점 머릿속을 채운다. 그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생각을 털어내려 애썼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 척을 할 걸 그랬나 봅니다. 사장님에 대한 것도 그랬고, 처음부터요.”
첫 단추라는게,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그는 웅얼거리며 차마 말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함께 지내는 사람들이 생겼고, 연락을 유지할 친우들이 생겼으며, 놓치기 싫은 인연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을 끊어내는 행동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게 이번의 가장 큰 패인이자 요인이었다.
“……제가 사장님 앞에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한참 동안 웅얼거리던 그는 그제서야 눈치를 살피며 시로코를 힐끔댔다. 여차하면 이대로 되돌아가서 집구석에 틀어박히는 것이 능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쓸데없는 이야기? 그럴 리가. 세상에 남의 인생사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거든.”
그리고 마치 극장을 관람하고 있기라도 한 듯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말에 오히려 안심하게 된 건 어째서일까.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선을 긋는 것이 느껴져서일지도 몰랐다. 쥰은 전혀 알지 못했으나 시로코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그와 동질감이 느껴지는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관두었다. 방금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을 테니까.
그 뒤에도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가족이 얽힐 가능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해외로의 망명을 생각한 것이었다. 동시에 다 지울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화살의 방향이 가족에게 향하지 않겠는가? 이 즈음에 와서는 쥰도 확실히 마음을 굳혔다. 아무리 과도한 최악의 상정이라지만 그 속에 함축된 감성을 알고 있다.
비일상을 향유하는 이들과 함께 신경을 곤두세우며 며칠을 지샌 탓에, 분위기 흐름을 파악하는 것엔 이제 이골이 났다고밖엔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역시 관두는 게 좋겠다고, 기회를 주시는 겁니까.”
그는 마른 세수를 하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힘없이 웃었다. 사람의 악의란 건 정말 복잡하군요.
“그럼, 마지막의 마지막에 오겠습니다. 제가 죽고 싶을 때요. 누구에게든 죽어도 괜찮을 때, …”
그러나 그 눈동자에 잠시 생기가 감돈다.
“이전까지는, 살아있는 동안의 지인으로서 잘 부탁드립니다.”
시로코는 자신이 그에게 왜 이런 조언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한 것 같았다. 아마도 아쉬워하겠지. 그러나 이미 떠나가고 있는 나룻배의 궤적을 돌리기에는 늦은 터라, 그녀는 그 파동을 점쳐보기에 그쳤다.
“…그래, 기왕이면 죽지 말고. 아, 뒤늦게서야 말하는 거지만… 나도 무상으로 해주는 건 아니거든.”
게다가 다방면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으니까? 그녀는 이것저것 다른 방식을 조언해주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해결책들이 많으니까. 그쪽이 한 짓을 무고한 한 사람에게 전부 뒤집어 씌워버릴 수도 있겠고. 그러다 여상히 웃으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이런 건 당신 취향이 아닐 것 같아서 굳이 추천은 안 했지만.”
“그러지 않기 위해서였으니까요.”
조심스럽게 말을 얹던 그의 몸이 조금 흔들하더니, 긴장이 풀린 듯 간이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고, 곧은 시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빚은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잘 된다면 갚을 자신도 있으니까요.
“제가 일상생활을 영위할 정도의 돈을 남겨둘 수 있을 만큼, 말입니다.”
물론 그럴 일은 이제 없어졌지만요. 하고 중얼거리자, 시로코는 되물었다.
“…난 당신의 그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한데.”
단순한 자기확신과 오만인가? 일반인인 당신이 그만한 돈을 벌어들일 기회가 대체 어디 있는지…. 퇴직금으로 해결될 정도의 돈도 아닌데 말야.
“…복권 당첨이라도 되려고?”
쥰은 잠시 동안 고민에 빠졌다. 다른 이들에게도 빚을 졌다는 이야기는 암암리에 돌았으나, 그에 따른 계획과 자신의 행동 등은 굳이 입 바깥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부정이 탄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꺼려진다고나 할까.
하지만 눈 앞에 있는 그녀는 자신에게 제법 많은 지식과 판단력을 안겨주었기에— 그는 생각보다 간단히 입을 열었다. 아주 단순한 명제였다.
“계열사들을 전부 도산시킬 겁니다.”
그 날, 한참 동안의 침묵과 뒤따른 폭소로 이야기는 종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