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커미션으로 작성된 창작 1차 드림 커미션입니다.
* 미연시 게임의 작법을 소량 따르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는 조금 거리감을 두는 게 좋겠다. 서술자와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이번 시간선을 ‘세이브’라 명시하기로 했다. 처음과 끝을 정해둔 채로 반복되는 시간을 지낸다는 ‘루프’라는 개념을 알고 있다면 쉬울 것이다.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는 장르는 으레 그런 법이니까. 그럼 장면을 한 번 바꿔보자. 그리고 반짝거리는 스킵 버튼을 누르자. 지루하거나 이미 알고 있는, 그리고 필요 없는 이야기가 빠르게 요약되어 지나갈 예정이다. 그러니—딸깍, 하고 하나부사 쥰은 마우스를 움직였다.
※이 이야기는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사건 등은 실존하는 것과 일절 관계가 없습니다.
라는 문장에서 그는 위화감을 느꼈다. 픽션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혼용되는 것인가? 의문점을 제시하고 나면 아마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키보드를 두드리던 감각을 상기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업무 메일을 잘못 보낸 것 같으니, 삭제를 부탁드립니다.]
시작은 단순한 메일 오발송.
[삭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러나 되돌아온 답장은 당돌하고, 간결했다.
“그야— 엄청 큰일이 나겠지?”
번화가 거리의 지하상가에서 뒷짐을 진 채, 리리는 입을 열었다. 아, 또 저런 눈인가. 속에서 휘몰아치는 감각이 곤란함과 함께 웅성거린다. “리리 양의 발상은 여전히 따라가기 어렵네요….” 그리고 토해내는 한숨. 고개를 저어낸 것은 덤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 곳에서 쇼핑용 백을 두어 개 양 손에 가득 채운 상태로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에 기반한 것일지 알 수 없다.
“저는 누가 봐도 소매치기보다는 짐꾼이잖습니까.”
“하지만 대중은 쥰 씨 같은 아저씨보단 내 편을 더 들어줄 걸.”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맥락을 알 수 없는 이야기. 굳이 설명하자면— 요컨대, 여기서 그녀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 사람들은 어느 쪽 편을 들어줄까? 경찰이 오려나? 같은 호기심이었다. 방금 전 지하상가를 순찰하던 경비원을 본 게 화근이겠거니 하며 쥰은 어깨를 밑으로 늘어뜨렸다. 조금 무거운 것이 들어 있던 종이가방이 팔을 타고 주륵, 흘러내린다.
“그럼 범죄자가 될 뻔한 쥰 씨—. 나 배고파.”
“적어도 제가 짐을 추스르는 것 정돈 기다려 주세요.”
이렇게 툴툴대는 것도 예전에는 못할 짓이었지. 그들의 만남은 제법 길었다. 사실 얼굴을 마주하고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지만, 상당히 오랜 교류를 지내왔었다. 아주 가벼운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주고받아왔던 메일은 어느 새 일상이 되었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가장 먼저 메일함을 열어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리리 양은 좋은 인터넷 친구였다—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걸 물어보기도 하고, 실없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일에 대한 것을 물어보기도 하다가, 다음에는 자신 쪽에서 리리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친구들의 이야기. 학교 이야기. 과제라거나, 진로에 대한 이야기. 여러가지가 섞여 조금씩 윤곽이 잡힐 즈음에, 어느 날 출장지가 잡혔다. 리리 양이 살고 있는 근방이었다.
[잠시 동안 가까워지겠군요.]
[그럼 오프, 해보지 않을래요?]
여전히 당돌하고 간결한 답장이 되돌아왔다. 쥰은 그 메일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도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물을 머금듯 글자를 한 음절씩 음미했다가, 인정했다. 그는 설레고 있었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는 건 언제나 해오던 일인데도….
답잖게 깔끔한 옷을 입었다. 넥타이의 색이 촌스럽진 않은지 고려해보기도 하고.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매만졌다. 괜찮겠지. 이상해보이진 않으려나. 하고 고민한 게 무색하게도,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리 양’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무리 이케부쿠로라지만 특이한 옷차림. 하늘하늘한 프릴에, 원색적인 천이 오밀조밀하게 붙은 옷깃을 흔들며 그녀는 자신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쥰은 그녀에게 대답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빠져들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리리 양이십니까.”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응, 맞아요. 그쪽은 하나부사 쥰씨?” 이름이 불리는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 미소를 지었다. “예. 처음 뵙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오랫동안 보아 왔으니까요.
그 날—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도 이 거리였다. 리리 양은 그에게 짓궂게 굴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하고… 가끔은 방금 전처럼 이상한 말도 하며 놀리기도 했지만, 자신을 아주 내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끔 먹이를 주듯 붙어오는 행동을 차마 받지 못한 채 당황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묘한 관계는 계속되었다. 어떤 관계냐,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서로 눈을 마주쳤다가, 그렇네요. 아마도 사귀기 직전인 걸까요. 라고 답할 수 있을 정도로.
몰매를 맞으면 어쩔 수 없다고나 할까…. 자각은 하고 있었다. 참 과분한 사람이고, 자신이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녀에게 있어서는 좋은 전前연인이 되어주는 게 가장 옳은 방향이 아닐까. 이것마저도 불손한 인식이라 한다면 별 수 없었다. 자신은 유혹과 먹이에 민감했고, 좋은 것을 참아내기엔 인내심이 부족했다.
“쥰 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을 깜빡이고 있자면 제 앞에서 양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날 앞에 두고 그렇게 멍해?”라고 하는 리리 양 덕에, 표정이 다시금 풀리고 만다. “당신 생각이요.” 본인을 앞에 두고선 당연히 본인 생각을 하지. 무엇이 다르겠냐는 듯한 대답에 그녀는 회신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잘못 대답한 건가? 하고 바라보자, 홱하니 뒤돌아 먼저 나아간다. 배가 많이 고프셨나. 예약 시간을 조금 더 앞당겨 둘 걸 그랬다.
* * *
“여기요. 손수건.”
익숙하게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넨다. 물기에 젖은 손을 강아지처럼 들고 있던 그녀는 그를 바라보더니, 눈을 가늘게 휘며 웃어보였다. 이럴 때는 꼭 짓궂게 굴곤 하는데. 쥰은 손수건을 든 채 응시했다. 아니나다를까, 손을 가볍게 내미는 움직임을 읽어낸다.
“직접 닦아 줘.”
“…네.”
그는 반항하지 않았다. 아니, 딱히 할 생각도 없었다. 차곡차곡 접어두었던 손수건을 두 세번 펼쳐 손을 얹을 정도로만 풀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감싸 물기를 닦아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식당의 클래식 음악. 흐릿한 사람들의 목소리. 화장실로 향하는 어중간한 길목 중앙에서 두 사람은 천 하나를 겹친 채로 양 손을 잡고 있었다. 물론 오래 걸리진 않았다. 뒤에서 발걸음이 들리는 것 같자 화들짝 놀라며 손수건을 회수하고, 헛기침을 하며 “이만 돌아갈까요.”하는 시간도 덤했으니 말이다. “범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웃음기 가득한 어투로 그를 놀리는 리리의 목소리는 안타깝게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거 중증이군.
그는 제법 눈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함부로 들이대는 행동은 누란지위. 위태로운 상황을 만들고 싶진 않아 매사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선을 넘지 않도록 주의했다. 하지만 리리는 그런 그의 행동을 잡아당겨 선을 넘어오도록 종용하고는 한다. 그러면 그 손짓을 따라 한 걸음 넘어가고선, 죄송합니다. 하고 뒤로 물러나길 반복하는 것이었다.
예약해둔 레스토랑의 서비스는 나쁘지 않았다. 식기가 조금 비뚤어져 있기에 조절해준 것을 제외하고는 플레이팅도 훌륭했다. 맛은… 글쎄. 그는 먹을 만하다고 느꼈지만 그녀는 어떨지 모르겠다. 식사 도중의 주제가 없다면 굳이 입을 열어 이야기를 하는 성정은 아니었기에 그는 고뇌를 거듭하며 포크로 파스타를 돌려 말았다.
“쥰 씨.”
“네?”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진다. 초점을 다시 맞추어 앞을 바라보면, 입가로 느껴지는 무언가. 그리고 가까이 왔다가 떨어지는 리리의 손이 보인다. “묻었는데도 모르고 있길래 닦았어.” 하고 해맑게 말하며 다시 자신의 수저를 들어올리는 그녀의 행동에 잠시 동안 몸을 굳혔다. 방금 손수건으로 입을 닦아 준 건가?
“…….”
큰일났군. 민망하다. 이대로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포크를 들기엔 부끄러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가 가라앉는다. 그는 한참동안 마저 식사를 지속할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얼굴에 열이 오른 것이 그제서야 식기 시작한다. “…감사합니다.” 응? 뭐가? 하고 되물어온 것에도 그는 달리 해명하지 않았다.
“잘 먹었어~”
식사는 엉망이었다. 도중부터는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아 그는 한숨을 쉬며 그녀를 살폈다. 배는 확실히 채우게 된 것 같아 다행이다만. 손목시계를 확인해보니 시간은 애매하고, …무언가를 만회하고 싶다는 생각에 빠졌다. 리리는 방금 샀던 머리띠들 중 하나를 포장 백에서 꺼내어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눈길을 빼앗기고 있다가, 문득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유원지 개장 포스터 하나.
“옥상…가시겠습니까?”
말이 헛나왔다. “아, 유원지 말입니다. 개장했다더군요. 이 위에.” 저녁이 되면 하늘이 예쁠 겁니다. 불꽃놀이도 하고요. 그런 장황하면서도 당황감이 섞인 말에, 리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중에는 무슨 이야기를 했던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니까… 나름대로 데이트 연장 신청을 성공한 건가? 그는 혼란에 빠진 채 아무런 자각 없이 입장표를 끊었다. 찍힌 금액은 적당했다.
와중에도, 리리는 그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식당에서부터 말수가 적어지길래 피곤해하는 건가 싶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답잖은 쑥쓰러움을 타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놀이공원에 대한 연대기를 이야기하는 건 또 뭐고, 그나저나 오늘 산 옷이라거나, 액세서리 같은 것만 해도 제법 되는 지출이었을 텐데… 그녀는 매표소의 안내판에 적힌 금액을 보고 난 뒤, 오늘의 영수증을 떠올려보며 당분간 구매력을 축소시키기로 했다.
* * *
간소화되어 있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있을 것은 다 있는 유원지. 노을이 지고 있어 조명 없이도 그림자와 기물들이 조화를 이루었다. 도보 라인을 따라 퍼레이드카가 지나가며 들뜨는 음악을 송출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아이들 중 한 명이 퍼레이드 카의 뒤를 따라 달리다가 넘어지려던 것을 잡아 주고 보내는 사이, 리리는 고개를 기울이고 있다가 씩 웃었다. 그리고 쥰의 손을 잡아 당겼다. 동시에 펑, 하고 허공에 폭죽이 터진다.
주변의 사람들도 어느새 라인 안으로 들어와 각자의 사람들과 스텝을 밟는다. 그가 어리둥절하게 둘러보고 있자면, 리리는 다시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팔 안쪽으로 몸을 회전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자세를 잡으며 활짝 웃는 얼굴로 바라보는 소녀의 표정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찬란했다. 어색했던 그의 웃음이 부드럽게 바뀌어나간다. 그녀의 춤을 따라 손을 내밀고, 발을 옮기고. 허공에서 흩날리는 파티클들을 모아 머리에 뿌려주면, 지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도 달려들어 손을 내저었다.
간만의 웃음이었다.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사람이 이런 곳에서 유치하게 굴고 있냐며 욕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순수하게 즐거워했고, 순간의 시간이 소중했다. 그는 되새긴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있는 날도 없었을 것이라고. 올라간 입꼬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리리의 시선 속에서도 그는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쫓아오는 것 같았지만, 자신의 손짓을 어떻게든 따라오며 받아주고, 허리를 잡아 가볍게 들어주는 움직임은 다른 이들 못지않았다. 단순히 놀아주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것만은 아니라는 일종의 반증을 이미 느끼고 있어 그녀는 그를 어떻게 다루어야 좋을지 고민했다. 물론, 놀리기 참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계속 바운더리 안에 두고 싶은 한편— 상처입히기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녀에게 춤을 신청하는 다른 누군가의 의사를 부드럽게 대신 거절해주며, 쥰은 비어 있는 리리의 다른 쪽 손을 잡아주었다. 퍼레이드의 행진이 다시 시작되고, 음악이 가라앉으며 사람들이 흩어진다. 그는 말 없이 응시하고 있다가, “되돌아가죠. 계속 여기 있다간 다른 분들과 부딪히겠습니다.” 라는 일상적인 말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조성된 길을 따라 걸으면 조명이 하나 둘씩 꺼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별이 얼마나 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내려다 본 도시 너머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하며 그는 리리를 잡아주었다. 간이 창살은 조금 위태로워 언젠가 안전사고가 날 것 같았지만, 얇은 덕분에 바깥 풍경이 잘 보였다.
곧 불꽃놀이가 시작되니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지 않길 바란다는 안내방송이 어렴풋이 들렸다. 이내 핑,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여럿 울리며 빛이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노란 빛에서, 녹빛, 흰빛, 분홍빛. 사람들은 저마다 목을 빼어 위를 올려다보고, 손가락질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환히 웃었다. 쥰의 옆에 있던 리리도, 그리고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올린 쥰도 비슷했다.
그는 순간을 만끽했다. 실은, 망친 것은 하나도 없었으나 만회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바라보며 천진난만하게 웃는 이 아이를 내칠 수 있을 리가. “불꽃놀이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까요.” 눈이 마주치자, 그는 넌지시 그녀에게 말을 건네었다. 리리는 고개를 갸웃하다 “뭐라고? 안 들려—” 하며 입모양을 크게 만들었다.
핑, 하고 다시 큰 소리가 울리며 하늘에서 빛이 터진다. 그에 맞추어 소리내 웃었다. 그녀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며 볼을 약간 부풀렸다. “다시 말해봐!” 이번에는 알아들어 보겠다는 듯 오기가 생기기라도 했는지. 그러나 쥰은 이미 그녀의 말을 전부 알아듣고 있었다. 타이밍이 좋았던 건가, 귀기울여 듣고 있었던 건가. 혹은 입모양 만으로도 알아챌 수 있었던 걸까.
그는 줄곧 잡고 있었던 리리의 손을 들어올려 손등에 입을 대었다. 가볍게 닿은 입술이 손등에 내려앉았다가 떨어진다. 그리고 힘을 주어 살짝 당긴다. 돌아갈까요. 굳이 입을 열어 말하진 않았다. 이것이 작별인사라는 건 아마도, 이해했을 터였다.
그러니 시뮬레이션은 여기서 종료.
오늘의 이벤트는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