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 날의 아침은 분주할 예정이었다. 새벽까지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인터넷 게시판을 훑던 남자는 결국 휴대폰을 뒤집어 엎으며 담뱃갑을 찾았다. 하나를 꺼내어 입에 물고 발코니에 서 있자면 찬 바람이 스멀거리며 옷깃 사이로 들어온다. 몸을 살짝 떨고, 숨을 내쉰다. 연기마냥 퍼져나오는 입김이 빠르게 사라진다.
“….”
역시 관둘까, 일이 있기도 하고.
하나부사 쥰은 입에 물었던 담배를 다시 네모진 갑 속으로 집어넣었다. 새해 다짐이라고나 할까, 그래. 정말로 끊어야 하지 않겠어. 제 뒤쪽의 거실에서 거나하게 취한 채 TV를 보고 있을 주정뱅이 사장님—이제 그의 가게가 사라졌으니 사장님이라 부르기엔 어폐가 있으나—을 저격하듯 생각을 거듭했다. 연기를 내뱉듯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입김을 허공에 불어넣는다.
해야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새로 재건한 회사의 일 말고도 그는 약속한 것이 있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의 도쿄에는 눈이 오지 않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물건너갔나. 하지만 한파이니만큼 당일에는 약간이라도 와 줬으면 좋겠는데. 슬슬 손 끝이 빨갛게 되는 것을 바라보며 발코니의 문을 열고 다시금 거실 안으로 되돌아간다. 잔뜩 덥혀진 온기가 그를 감싸고, 시끄러운 TV 소리와 그 사이 마지못해 졸고 있는 동거인이 보였다.
“사케시 씨. 침대에서 주무십시오.”
“으엉? 어….”
대답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거구의 팔을 어떻게든 잡아끌고는 침대 위로 던져두었다. 어디 나가서 비명횡사할지 몰라 도어락의 번호도 알려주었던 게 화근이었다. 이제는 아예 눌러 살게 된 것이… 뭐, 원래 혼자 살기 위한 곳은 아니어서 나쁘진 않다만. 기지개를 펴듯 몸을 푼 뒤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나면 남은 것은…. 문득 소파 근처를 바라본다. 즐비어 서 있는 병이 장식마냥 나동그라져서는.
일찍 자긴 또 글렀군.
쥰은 김이 서린 유리창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다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늘어놓아진 술병들을 달그락대며 치우기 시작했다.
* * *
[그래서 잠이 부족했다고요?]
“예, 비슷합니다…만, 그래도 평소와 비슷하게 자고 나왔습니다.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침의 찬 공기에서는 상쾌한 향이 나곤 했다. 특히 추운 날에는 더욱 그랬다. 모 대학의 교수가 말했던가, 식물의 잎에서…, 아니. 이 이야기는 지루하니 끊어두도록 할까. 당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눈 앞에는 또다른 향내가 가득한 죽은 자들의 장소가 있었기에.
‘토라사와 준’은 그곳에 있었다. 같은 성을 가진 ‘토라사와’가 곁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짓했다. 문자도 없이, 그저 향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생을 마감한 인간의 끝이 그곳에 있었다. 시작의 인사를 하러 온 소년은 웃고 있었을 지, 울고 있었을 지조차 알 수 없어 잠시 눈을 피했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 종결점을 바라보았다.
향이 진했다.
오늘은 그의 새로운 시작이자, 작별이었다.
소년은 그의 자리에 만년필을 두었다. ‘토라사와 렌’이라는 이름이 각인된 녹색의 만년필이었다.
그리고 비로소 청년이 된다.
누군가의 성장 과정을 바라보는 것은 의외로 착잡했다. 그의 과거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지, 혹은 그가 만년필의 선단으로 어떠한 짓을 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을지, 그것도 아니라면 단지 청년의 형이 자신과 비슷한 이름에— 자신과 생전에 대화를 나누어 본 적 있는 단조로운 인터넷 친구여서였을지.
“…이만 갈까요.”
고개를 꾸벅 숙이는 모습을 바라보고, 먼저 말을 건네었다. 청년은 지금까지처럼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요한 밤이 밝았다.
성탄절이었다.
* * *
이후의 일은 조금 문제였다. 아니나다를까,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그래도 쉬게 해 주겠네! 라고 했던 상사의 발언에 무색하게 ‘제발, 1시간 정도면 되니 팩스만 어떻게든 전달해줄 수 없겠나?’라는 부탁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제 집이 회사에서 가장 가깝기도 한 데다가 이런 부탁을 쉽게 들어줄 사람도 자신 뿐일 테니까.
누군가가 보았다면 불쌍하다, 라던가. 이야기할 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모종의 만족감을 느끼며 사무실로 향했다.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것이 비록 엑스트라라 하더라도 족했다. 오히려 엑스트라보다는 관객으로 기용해주었으면 한다. 흘러가는 이야기를 바라보는 것은 활자로도 영상으로도 눈을 뗄 수 없는 즐거움이 있으니까.
어항을 바라보는 고양이의 심정이 그러할까?
노이즈가 잔뜩 낀 TV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자가 그러할까.
결단코 이야기에 개입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적에야 그는 안심하곤 했다. 자신이 이야기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은 묘하게도 두려움을 주곤 하였다. 손가락 끝도 화면에 비추어져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결국 카메라에 잡히고 만다면 소품으로만 기용되어야 했다.
그래, 소품.
세계의 소품으로 말이다.
팔락, 팔락. 팩스에 용지를 집어넣으며 버튼을 누르고 있자면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 생기면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굴어보라니. 당치도 않은 이야기라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벌써 몇 번이고 생각한 것이지만, 그는 여전히 두려움에 함뿍 절여져 있었다.
그 날의 기억은 트라우마와도 같았다.
유명한 잡지 모델, 하나사에 양이 연인을 관통시킨 그 날.
쥰은 달그락대며 작동하고 있는 팩스기를 놓아 두고, 사무실을 다시 잠글 준비를 하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역시나, 와 있는 메일. 이모티콘으로 가득 차있는 특이한 형식이 돋보였다. 예상한 대로, 하쿠나마미치 하나사에, 라는 발신자가 상단에 떠 있다.
「불참은 죽음 뿐☆ (๑´ლ`๑)フフ♡」이라니, 당신이 이야기하면 진담 같다고요.
….
아니, 진담인가?
* * *
찬 공기가 살을 에워싸고 지나간다. 그는 말 없이 받은 선물을 손에 쥐었다. ‘그 채팅방’의 인원들이 대부분 있었던가? Hkun 씨도 제법 유명인사였으니까. 온에서도 오프에서도 그 사람은 역시 말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라멘 정도는 한 번쯤 먹어줄 걸 그랬나.
반발심과 두려움이 가득하던 마음이 왜 이리 풀렸나? 라고 츳코미를 건다면, 그가 쥐고 있던 작은 인형을 살펴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는 참으로 단순하여 아이들이 제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하고 있자면 금세 마음이 풀리고 말았다. 안경을 쓰고 있는 회사원 고양이라. 저는 안경도 쓰고 있지 않고 고양이도 아닌데요. 하면서 반박하니 ‘닮았는데?!’로 일축해버린 당돌한 목소리가 스친다.
실은 벌써부터 마음을 놓으면 안 될지도 몰랐다. 쿠츠나기란 그에게 있어 미지의 존재들이었고,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 어떠한 계획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집단이었으니까. 게다가 ‘전염’같은 게 된다고? 하지만 현실감이 없었던 터라, 그는 판단을 무산시켰다. 그리고 미뤄버리고 말았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
하고 말이다.
그는 받은 목도리 중 하나인 남색 목도리를 들어올려 목에 둘렀다. 허전한 목 아래가 채워지자 온기가 켜켜이 쌓이기 시작한다. 숨을 내쉬면 또다시 입김.
“메리 크리스마스.”
하늘은 푸르다.
눈은 결국 오지 않았다.
뭐, 그래도 하얗지 않은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나쁘지 않군. 선물도 받고, 사람도 만나고.
“….”
나름대로, 평화롭고 말이다.
호흡 속에서 삶의 연기가 피어나온다.
역시 새해에는 담배를 끊는 게 좋겠습니다.
물론—… 긴장할 일만 앞으로 더 없다면 말입니다.